고조선의 성립과 발전의 역사
기자의 후예 "조선후"
고조선의 본래이름은 "조선"이다. 조선이란? "태양이 뜨는 자리"라는 뜻인 고대 우리말 "아사달"의 중국식 표현이라고 한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쓰면서 단군신화에 나오는 조선을 위만조선과 구분하려는 의도에서 "고조선(옛조선)"이라고 이름 붙이면서 이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고조선이라 할 때는 단군 신화가 말하는 단군조산, 중국 은나라가 망할 때 가자기 망명하여 세웠다는 기자조선, 그리고 한나라 초기에 연나라 사람 위만이 건국한 위만 조선등을 아울러 가리킨다.
기원전 8세기를 전후하여 청동기문화를 가진 집단이 남만주 요동 일대를 중심으로 등장해는데, 이 집단이 차츰 성장하면서 조선이라 불려진 것으로 보인다. 중국 춘추시대이 사실을 기록해 놓은 <관자>라는 책에는 조선이 당시 중국의 제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실려 있다. 고조선의 실체가 분명해지는 것은 기원전 4세기 무렵이다. 위락의 일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주가 쇠하자 연의 공이 왕을 칭하여 동으로 영토를 넓히려고 했다. 이때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가 스스로 왕이라 일컫고 군사를 일으켜 연을 공록 간하고, 연에 사신으로 가서 연왕에게 설득함으로써 양국의 무력추올은 면하게 되었다.
비파형 동검, 청동기시대의대표적인 유적으로 중국 동북부에서 한반도 전역에 걸쳐 발굴되었으며, 이는 이 지역이청동기시대에 같은 문화권에 속했음을 말해준다. 요동반도 여대시 고분 출토, 기원전 8~7세기.
기원전 4세기 후반즘 고조선은 당시 중국인들이 "교만하고 사납다"고 경계할 정도의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고조선은 요하를 경계선으로 하여 연과 대립할 만큼 국가영역이 드넓었다.
그러면 고조선의 주임지는 어디였을까?
그동안 한사군의 위치와 관련하여 고조선의 중심지는 평양인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 평양설은 일본학계와 일부 한국학계의 주장으로 오랫동안 정설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평양설은 고조선 연구가 깊이 있게 진행되면서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한반도 청동기문화의 성립지역과 관련지어 비파형 동검문화권인 요령지방, 요하 상류, 산둥반도 부근, 만주지역등을 중심으로 고조선이 성립,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다.
강화 지석묘, 경기도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사적 제137호, 대형의 북방식 고인돌로 높이 2.6cm,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7.1cm, 너비5.5m이며, 화강암이다. 고인돌은 두개의 긴 굄돌판이 있는데, 방향은 대략 남북이다.
나아가 전성기의 서쪽경계가 난하, 요하, 대릉하로 점차 이동 했다고 보고 있는 견해도 있다.
물론, 현재까지는 고고학의 성과와 중국측 문헌을 가지고 고조선의 성립시기와 그 지역을 추측해보는 단계에 불과핟. 고조선이 강역문제는 한사군 위치문제와 관련하여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민족적인 감정보다는 보다 학술적이고도 깊이 있는 연구가 선생되어야 할 것이다.
동북아시아의 강자였던 고조선 사람들의 강자였던 고조선 사람들의 사회생활은 어떠했을까?
당시 고조선에는 "8조법"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가운데 3개 조항만이 <한서>지리지에 전하고 있다.
1. 사람을 죽인자는 즉시 죽인다.
2. 남에게 상처를 입힌자는 곡물로써 갚는다.
3. 도둑질한 자는 그집의 노비로 삼는다.
단, 노비를 면하고자 할대는 50만의 돈을 내야 한다.
이 법의 조항만으로도 엄격한 법 집행이 이루어진 사회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이러한 법외ㅔ도 고조선 사회가 "여자가 정절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고 전하고 있다.
살인자를 사형에 처한ㄴ 것은 원시공동체사회 이래 보편적으로 행해졌던 처벌인데, 고조선도 예외는 아니였다.
"8조법"에서 나타나듯이 고조선은 계금의 분화와 사유재산의보호가엄격히 보장된 사회였다.
이 밖에 고대노비들은 주인을 위해 무제한의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다. 노비는 주인이 죽어서도그 시중을 들기 위해무덤 속까지 끌려가야하는 존재였다. 이를 순장제도라 하는데, 노비 주인들은 죽은 뒤에도 노비를 부리면서 저승에서 생활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현재 순장의 흔적은 요동지역 고조선의 유적인 강상무덤. 누상무덤에서 발견된다. 이들 무덤에서 1벽여 구가 넘는 순장된 노비들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 노비가 얼마나 보편화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고조선 사회에는 노비 외에도 많은 평민이 있었다. 이들은 사유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으며 신분적으로도 자유로운 존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서 본 8조법규에서와 같이 형벌이나 채무로 인해 경제적 기반을 잃고 노비로전락할 가능성도 있는 불안정한 신분이기도 했다.
하오라고불리는, 고조선과 이웃한 부여의 평민들에게서 그와같은 모습을 읽을 수 있는데, 이들은 후대의노비와는 그 성격이 매우 다른 존재로서, 신분은 평민이었으나 노비에 가까운 지배를 받았다.
기자조선, 정말 존재했나?
기자조선이란 기자동래 전설에서 나온 것이다. 기자는 중국 은.주 교체기에 살았던 현인이었다고 알려지는데, "무왕에 의해 조선왕으로 봉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외에도 "조선에 망명하여 단군조선을 교체했다"는 설도 아울러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의 기자 숭배는 매우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고구려의 평양도읍 시기에 기자가 민간신앙의 차원에서 받들어졌고, 고려 때는 왕실에서 공인되어 제사가 행해지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ㅇ학자들 사이에 기자를 성현으로 숭배하는 풍조가 만연되기도 했다.
선진시대 중국문헌에는 기자와 조신이 별개로 취급되다가 진한시대 이후 연결되어 동래전설로 등장했다.
따라서 그 사실성에 회의를 품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다.
현재 학계에서는 기자전설을 동이족 계통인 기자족의 이동과 고나련하여 이해하려는 견해와 기자조선은 부정하지만, 그 기간을 예맥족이 근간이 된 예맥조선으로 설정하고자 하는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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