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미천왕 낙랑군을 멸망 시키다.

 

안녕하세요. 고구려 미천왕이 마지막까지 낙랑군을 멸망 시킨 사건을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고구려 미천왕은 모두 잘 아시겠지만, 큰아버지를 피해 궁궐에서 도망을 치고 머슴살이와 소금장수를 하다 다시 왕위를 계승한 왕입니다.

 

 

 

어렸을때에도 머슴살이와 소금장수를 한 미천왕은 왕실의 자손으로 당당한 자세를 잃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가 왕위에 앉고 고조선을 무너뜨린 중국의 한나라는 낙랑, 진번,임둔, 현도, 4군을 설치하고지배권을 장악했다. 허나 진번, 임둔군은 고조선 유민들의 반발로 폐지되고, 현도군은 고구려의 세력에 밀려 서쪽으로 쫓겨났다.

 

 

 

낙랑군은 이후 420년동안 있었지만, 313년 미천왕 때 흡수됨으로 중국세력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대방군도 고구려 미천왕으로 흡수가 되었다.

 

 

이처럼 미천왕은 고구려의 영토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위해 나라를 위해 참 위대한 일들을 많이 했으며, 이후 고구려가 미천왕의 발판을 삼아 후에 강대국으로 크게 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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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얼 통청운동

역사 2014. 2. 8. 00:07
서얼 통청운동

 

 

 

안녕하세요^^

오늘은 역사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서얼 통청운동 들어 보셨나요?

간단히 한번 알아 볼께요^^

 

 

1. 서얼 통청운동

 

서얼 통청운동이란 서얼차대의 철폐, 즉 서얼의 문무핵심 관직진출의

허용을 요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 운동은 서얼의 숫적 증대와 함께 한미한 서자 출신인 영조가

즉위하면서 활기를 띠었다.

 

 

그 결과 1772년에는 문과의 양사와 무과의 선전관에,

1777년에는 지방의 향임직에도 임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얼들은 19세기 초에 천주교에 귀의하거나 역모사건이나

당쟁에 가담하면서 대규모 소통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서얼차별은 상당 부분 해소되어 가다가

1894년 갑오개혁에서 제도적으로 완전히 폐지 었다.

 

 

0123

 

 

간단하게 알아본 서얼 통청운동 어떻게 도움이 되셨나요?

원하시는 정보를 얻으셨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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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역사 2014. 1. 30. 11:55

대원군

 

 

오늘은 역사 이야기라고 할까요?

 

대원군에 대해서 간단히 풀이를 해보려고해요

 

 

흥선대원군 덕흥대원군 등 대원군 이라는 역사적 인물들이 있는데요

 

대원군 이 말의 정의를 간단히 알아 볼께요

 

1. 대원군

대원군이란 왕위를 계승할 적자손이나 형제가 없어 종친 중에서

왕위를 이어받을 때 신왕의 생부를 호칭하던 말이다.

14대 왕 명종이 후사없이 죽자 덕흥군(중종의 7째 아들이며 명종의 이복동생)의

아들이 15대 왕 선조에 즉위한다.

그리고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을 덕흥대원군으로 추존하였으니,

대원군 제도는 여기서 비롯되었다.

이 외에 인조이 아버지 정원대원군,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등이 있다.

 

 

012

 

 

우리나라는 혈통을 중시던 나라로서 왕위 또한 아무나 할 수 없는 나라 였네요

한번 왕은 영원한 왕이다 라는 말이네요

그래서 동방예의지국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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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량과 거칠부

역사 2014. 1. 11. 16:24

혜량거칠부

 

 

 

안녕하세요..^^

오늘은 역사 이야기를 해보려구

승려 였던 거칠부하면 생각나는 것이 바로 혜량이죠^^

오늘은 간단하게 혜랑과 거칠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게요

 

1. 혜량과 거칠부

 

거칠부는 진골 출신으로젊어서 중이 되어 사방을

 

돌아다니다 고구려 사방에 들어갔다.

 

마침 승려 혜량이 불경을 강론하는 자리에

 

참석했다가 눈에 띄어 신라인임을 고백하게 되었다.

 

혜랑으로부터"그대는 장수가 될 상이다. 만약 군사를 거느리고

 

오거든 나를 해치지 말라"는 말을 듣고 다짐한 뒤 귀국했다.

 

그는 진흥왕의 명을 받아 국사를 편찬했고,

 

서기 551년 신라와 백제가 공동으로 고구려를

 

공격할 때 8명의 장수들과 죽령 이북의 10군을 탈취했다.

 

 

01

 

이때 다시 혜랑을 만나 수레에 태우고 같이 돌아왔다.

 

혜랑은 신라에서 승통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백좌강회와

 

팔관회를 열기도 했다.

 

거칠부는 576년에 상대등이 되어 군사권을

 

맡아보다 생을 마쳤다.

 

혜량과 거칠부에 대해서

원하시는 정보를 얻으셨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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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음전

역사 2014. 1. 9. 22:45

공음전

 

 

안녕하세요..^^

 

오늘은 역사 이야기 해볼려구요

 

혹시 공음전 들어 보셨어요?

 

1. 공음전

 

공음전은 본래 국가에 대한 공훈이 잇는 공신에게

 

주었던 것으로 현종대를 거쳐 1049년에 완비되었다.

 

 

 

그 내용은 5품 이상의 귀족관료에게 관품에 따라

 

전시를 지급하여 자손에게 세습하도록 하였다.

 

지급 내용을 보면, 1품의 전지 25결과 시지 15결로부터

 

 5품의 전지 15결과 시지 5결로 차등을 두었다.

 

 

01

이는 고려귀족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것으로,

 

5품 이상의 고관 자제에게 음서의 혜택을 준 것과

 

함께 문벌귀족을 보호하는 제도였다.

 

 

 

공음전에 대해서

 

원하시는 정보를 얻으셨는가요?

 

추운 날씨 감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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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미천왕

역사 2013. 12. 28. 20:44
고구려 미천왕

 

 

 

안녕하세요..^^

오늘은 고구려 미천왕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려구해요

미천왕은 유명하죠 고구려

 

1. 고구려 미천왕

미천왕의 어릴 적 이름은 을불이었다. 봉상왕이 자신의 동생이자 을불의 아버지인 돌고를 죽이자, 을불은 도망쳐 남의집 머슴살이를 하거나 소금장사를 하기도 하였다.

국상 창조리가 폭정을 참지 못해 봉상왕을 죽이고 을불을 찾아 옹립하니, 그가 바로 미천왕이다.

미천왕은 먼저 중국과 낙랑을 연결하는 요충지 서안평을 공격. 확보하고, 이어 한족의 동방 침입의 기진인 낙랑과대방을 점령함으로써 고조선 시대의 옛 당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어 대륙의 혼란으로 중국 동북지역에서 이주해 오는 유인민들을 포용하면서 요동지방에  대한 본격적인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그에 따라 고구려는 모용씨, 단씨, 우문씨 및 한인 잔여세력과 치열한 각축을 벌이게 되었다.

소금장수가 고구려 왕위에 오르게 되었네요^^

 

도움이 되셨어요?

오늘은 고구려 미천왕에 대해서 간단하게 보았어요..머슴살이와 소금장사를 하다 왕위에 오른 미천왕 그가 걱정한것은 한나라의 미래가 아니였을까해요..동생이 왕이 되고 싶어 아버지를 죽이고 가족들을 죽이는 엄청난 일들을 벌이는 가운데 가슴이 아파 정말 죽고 싶었을 텐데..고구려를 걱정한 미천왕은 나를 위해 다시 왕이 되었던거 같아요~

개인적인 저의 생각입니다. 물론 육적 혈통이 왕위를 계승하는것이 맞지만요..

고구려 미천왕의 마음과 생각은 어떠 했을까요? 왕위에 오른 미천왕은 행복한 나날은 아니였을꺼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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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맹부 - 중국의 서예가

 

 

 

 

안녕하세요..

 오늘은 중국의 서예가이며 화가인 조맹부의 생애에 대해서 간단하게 알아볼께요

중국의 화가라 조맹부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분들이 계실건데요 오늘 한번 조맹부에 생애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께요

 

 

 

 

1. 중국의 서예가이며 화가인 조맹부..

 

중국의 저명한 화가이며 서예가인 조맹부는 68세로 죽었는데요. 송나라 종실의 피를 이어받은 조맹부는 쿠빌라이 칸 밑에서 관직을 맡았었고, 예술가로서뿐만 아니라 사회 저명인사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조맹부의 작품은 독창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다지 고풍을 따르지는 않았지만 조맹부는 중국 그림의 전통적인 주제를 모두 포괄하려는 듯 엄청나게 광범위한 화풍과 주제를 다루었다.

 

 

 

 

조맹부의 풍경화에는 특히 색깔과 공간감이 적절하게 잘 표현되어 있는데 당대 최고의 서예가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놀라운 사실은 아니지만 풍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조맹부는 선명한 붓자국과 물감을 엷게 바르는 기법을 택하였다. 유명한 작품으로는 작산과 화산의 가을 풍경를 그린 <작화추색도>와<물의 마을>이 있다.

 

 

 

 

 

중국의 유명한...

 서예가 조맹부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도움되셨나요?

조맹부의 뛰어난 그림과 조맹부 글체는 지금 세계적으로 유명한데요..

저도 다시 한번 그의 그림과 글을 보니 놀랍기만한거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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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메이지유신 결과

 

 

 

 

 

 

안녕하세요^^ 오늘은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그 결과에 대해서 한번 간단하게 알아 볼게요

일본이 메이지유신이 성공한 결과에 대해서 볼께요

 

일본의 메이지유신의 결과에 대해서 저의 생각으로 말한다면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도쿠가와막부를 붕괴되고 메이지유신 정부의 국왕집권제와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문명 및 정신적 혁명이라고 말할수 있지 않을까생각해요

 

 

 

 

본론으로 이야기를 들어 가볼까요

때는 1853년 일본 앞바다에 흑선이 입항하게 되는데 바로 미국의 페리 제독의 이끄는 함대로 일본의 개국이 시작되려하는데 당시 일본은 쇄국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던터라 중대한 선택의 길호에 서 있었다.

 

 

 

 

페리 제독의 강요로 일본은 어쩔수 없이 200년간의 쇄국정책을 마무리하고 개국을 하게 되며, 1858년 미일 수호 통상조액을 맺는다. 조항의 내용에는 시모다항구외 4개항, 오사카의 시장을 개방하며, 일본의 관세를 상호 협의하에 결정하기로 하며, 도한 영사 재판권 또한 받아들이기로 한다.

 

 

 

 

 

잠에서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한 일본은 외국상품 수입으로 경제가 약해지며 생활이 어려워지게 된다.

생활이 어려줘지자 외세배격운동이 발생하는데 바로 메이지유신의 시작이다.

나누워졌던 정부를 국왕중심으로 새로운 국가를 만들자는 정신적 혁맹이 일어나는데요

도쿠가와막부가 막을 내리고 국왕중심의 막강한 메이지유신 정부가 시작된다.

새로 들어선 메이지유신 정부는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게 되며, 메이지정부는 서양의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상공업을 장려하는 근대화산업에 힘을 기울인다.

 

 

 

 

메이지유신 그 결과 광범위한 산업혁명이 진행 되며 일본의 근대화가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페리 제독을 통한 미국의 개항이 없었다면 과연 일본의 메이지유신 결과는 어떠해겠는가?

일본 메이지유신이 성공할수 있었던건 미국의 페리제독이란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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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 업적

역사 2013. 12. 2. 22:46

김춘추 업적

 

 

 

 

선덕여왕 11년 백제군이 대양주를 공격하여 대양성주 김품석과 그의 아내를 죽이고 말았는데, 그녀는 김춘추의 딸이었다.

때문에 김춘추의 가슴에 맺힌 한은 어떻게든지 백제를 멸망시키고 싶다는 것이었다.

김춘추는 백제를 멸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왕에게 나아가 말했다.

 

"원컨데 사명을 받들고 고구려로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 대한 원을 갚고자 합니다." 그말을 들은 왕은 곧바로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다.

김춘추가 고구려 땅에 들어서자 보장왕은 그를 맞아 잔치를 베풀어 극진히 대접하였다. 그런데 이때 어떤 신하가 왕에게 이렇게 간하였다.

 

 

 

 

"신라 사신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이번에 그가 온것은 고구려이 사정을 살피려 함이니, 왕께서는 그를 죽여 후환이 없게 하소서." 그의 말을 듣고 의심이 생긴 보장왕은 김춘추에게 대답하기를 어려운 문제를 물어 욕을 보여 위협을 가하려고 하였다. 왕은 김춘추를 꾸짖으며 말했다.

"마목령과 죽현은 본래 우리 땅이니, 그것을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고는 돌아가지 못하리라."

김춘추는 그말에, "나라의영토는 일개의 신하가 마음대로할 바가 아닙니다. 저는 감히 그 명을 받을 수없습니다." 하고 곧바른 대답을 하였다.

 

 

 

 

이에 화가 난 보장왕은 김춘추를 감옥에 가두라고 명하였고 옥에 갇힌 김춘추는 생각 끝에 자신이 가지고 온 푸른 베 300보를 아무도몰래 왕의사랑을 받고 있는 신하 신도해에게 선물로 주고자기를 빼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자 농담처럼 김춘추에게 이야기를 하나를 귀뜸해 주었다.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 였다. 도해의 이런 이야기를 들은 김춘추는 그것이 무엇과 비긴 것을 깨닫고서는 곧 보장왕에게 글을 보내었다.

 

 

 

 

"두 고개는 본래 고구려 땅이니, 신이 귀국하면 대왕께 여쭈어 돌려 드리도록 하겠나이다." 그러자 보장왕은 무척 기뻐 날뒤며 김춘추를 풀어주고신라로 돌려보냈다.

이렇게 고구려의 힘을 빌리려는 김춘추의 계획이 무산되자, 신라의 김춘추는 당나라로 직접가서 태종을 만나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킬 정치 군사 동맹을 맺었다. 또 두 나라를 명망시킨 다음 대동강 이북 지역을 당나라에게 넘겨주겠다는 비밀 약속까지 하였다.

 

 

 

 

한편, 당 태종은 여러번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번번히 패하였던터라 장기전을 벌여 고구려를 정복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신라가 군사를 요청하니 바라던 것이었다.

이리하여 신라는 당과 함께 연합군을 편성하여 백제를 공략했다. 무력한 백제 지배층은 싸움 한번 제대로 해보지 않고 항복했으며, 다시 신라와 당은 지배층이 서로 다투고 있는 고구려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688년에 있었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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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성립과 발전의 역사

 

 

 

 

 

기자의 후예 "조선후"

고조선의 본래이름은 "조선"이다. 조선이란? "태양이 뜨는 자리"라는 뜻인 고대 우리말 "아사달"의 중국식 표현이라고 한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쓰면서 단군신화에 나오는 조선을 위만조선과 구분하려는 의도에서 "고조선(옛조선)"이라고 이름 붙이면서 이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고조선이라 할 때는 단군 신화가 말하는 단군조산, 중국 은나라가 망할 때 가자기 망명하여 세웠다는 기자조선, 그리고 한나라 초기에 연나라 사람 위만이 건국한 위만 조선등을 아울러 가리킨다.

기원전 8세기를 전후하여 청동기문화를 가진 집단이 남만주 요동 일대를 중심으로 등장해는데, 이 집단이 차츰 성장하면서 조선이라 불려진 것으로 보인다. 중국 춘추시대이 사실을 기록해 놓은 <관자>라는 책에는 조선이 당시 중국의 제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실려 있다. 고조선의 실체가 분명해지는 것은 기원전 4세기 무렵이다. 위락의 일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주가 쇠하자 연의 공이 왕을 칭하여 동으로 영토를 넓히려고 했다. 이때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가 스스로 왕이라 일컫고 군사를 일으켜 연을 공록 간하고, 연에 사신으로 가서 연왕에게 설득함으로써 양국의 무력추올은 면하게 되었다.

 

 

비파형 동검, 청동기시대의대표적인 유적으로 중국 동북부에서 한반도 전역에 걸쳐 발굴되었으며, 이는 이 지역이청동기시대에 같은 문화권에 속했음을 말해준다. 요동반도 여대시 고분 출토, 기원전 8~7세기.

 

기원전 4세기 후반즘 고조선은 당시 중국인들이 "교만하고 사납다"고 경계할 정도의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고조선은 요하를 경계선으로 하여 연과 대립할 만큼 국가영역이 드넓었다.

그러면 고조선의 주임지는 어디였을까?

그동안 한사군의 위치와 관련하여 고조선의 중심지는 평양인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 평양설은 일본학계와 일부 한국학계의 주장으로 오랫동안 정설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평양설은 고조선 연구가 깊이 있게 진행되면서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한반도 청동기문화의 성립지역과 관련지어 비파형 동검문화권인 요령지방, 요하 상류, 산둥반도 부근, 만주지역등을 중심으로 고조선이 성립,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다.

 

 

 

강화 지석묘, 경기도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사적 제137호, 대형의 북방식 고인돌로 높이 2.6cm,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7.1cm, 너비5.5m이며, 화강암이다. 고인돌은 두개의 긴 굄돌판이 있는데, 방향은 대략 남북이다.

 

나아가 전성기의 서쪽경계가 난하, 요하, 대릉하로 점차 이동 했다고 보고 있는 견해도 있다.

물론, 현재까지는 고고학의 성과와 중국측 문헌을 가지고 고조선의 성립시기와 그 지역을 추측해보는 단계에 불과핟. 고조선이 강역문제는 한사군 위치문제와 관련하여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민족적인 감정보다는 보다 학술적이고도 깊이 있는 연구가 선생되어야 할 것이다.

동북아시아의 강자였던 고조선 사람들의 강자였던 고조선 사람들의 사회생활은 어떠했을까?

당시 고조선에는 "8조법"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가운데 3개 조항만이 <한서>지리지에 전하고 있다.

1. 사람을 죽인자는 즉시 죽인다.

2. 남에게 상처를 입힌자는 곡물로써 갚는다.

3. 도둑질한 자는 그집의 노비로 삼는다.

    단, 노비를 면하고자 할대는 50만의 돈을 내야 한다.

 

이 법의 조항만으로도 엄격한 법 집행이 이루어진 사회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이러한 법외ㅔ도 고조선 사회가 "여자가 정절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고 전하고 있다.

살인자를 사형에 처한ㄴ 것은 원시공동체사회 이래 보편적으로 행해졌던 처벌인데, 고조선도 예외는 아니였다.

"8조법"에서 나타나듯이 고조선은 계금의 분화와 사유재산의보호가엄격히 보장된 사회였다.

 

 

 

 

이 밖에 고대노비들은 주인을 위해 무제한의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다. 노비는 주인이 죽어서도그 시중을 들기 위해무덤 속까지 끌려가야하는 존재였다. 이를 순장제도라 하는데, 노비 주인들은 죽은 뒤에도 노비를 부리면서 저승에서 생활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현재 순장의 흔적은 요동지역 고조선의 유적인 강상무덤. 누상무덤에서 발견된다. 이들 무덤에서 1벽여 구가 넘는 순장된 노비들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 노비가 얼마나 보편화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고조선 사회에는 노비 외에도 많은 평민이 있었다. 이들은 사유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으며 신분적으로도 자유로운 존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서 본 8조법규에서와 같이 형벌이나 채무로 인해 경제적 기반을 잃고 노비로전락할 가능성도 있는 불안정한 신분이기도 했다.

하오라고불리는, 고조선과 이웃한 부여의 평민들에게서 그와같은 모습을 읽을 수 있는데, 이들은 후대의노비와는 그 성격이 매우 다른 존재로서, 신분은 평민이었으나 노비에 가까운 지배를 받았다.

 

기자조선, 정말 존재했나?

기자조선이란 기자동래 전설에서 나온 것이다. 기자는 중국 은.주 교체기에 살았던 현인이었다고 알려지는데, "무왕에 의해 조선왕으로 봉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외에도 "조선에 망명하여 단군조선을 교체했다"는 설도 아울러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의 기자 숭배는 매우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고구려의 평양도읍 시기에 기자가 민간신앙의 차원에서 받들어졌고, 고려 때는 왕실에서 공인되어 제사가 행해지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ㅇ학자들 사이에 기자를 성현으로 숭배하는 풍조가 만연되기도 했다.

선진시대 중국문헌에는 기자와 조신이 별개로 취급되다가 진한시대 이후 연결되어 동래전설로 등장했다.

따라서 그 사실성에 회의를 품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다.

현재 학계에서는 기자전설을 동이족 계통인 기자족의 이동과 고나련하여 이해하려는 견해와 기자조선은 부정하지만, 그 기간을 예맥족이 근간이 된 예맥조선으로 설정하고자 하는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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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현이네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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