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와 바르샤바조약기구

 

 

 

vs 

 

 

아시아에서 발생한 전쟁들은 동서 양 진영을 더욱 명확히 구분했다. 독일처럼 중국, 한국 그리고 베트남은 둘로 나뉘었다. 소련은 미국과 미국의 우방이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중을 에워싸고 숨통을 조이려한다며 비난했다.

미국이 보기에 소련과 소련의 "형제국"들은 공산주의를 온 세계에 퍼뜨리려는 야심을 키우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나라는 두진영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동서는 상대편에 대해 위협감을 느끼며 모든 수단을 동원해 대항했다. 그러나 아무도 죽음을 부르는 전쟁을 원하지는 않았고 그보다는 상대방이 세력을 넓히지 못하도록 노력했다.

 

 

 

 

1950년대 들어 양 진영은 각자의 뜻을 굳건히 하는데 더욱 힘을 기울였다. 미국은 1949년 캐나다 및 서유럽 10개국과 정치적 연합체인 북대서양조약을 맺고 곧이어 여기에 군사적 연합을 더해 북대서양조약기구, 즉 나토를 창설하였다.

나토는 회원국 가운데 한나라가적의 공격을 당할 경우 나머지 회원국들이 함게 방어에 나서기로하였다.

이후, 몇 년 동안 미국은 중동, 태평양, 그리고 아시아의 국가들과 군사동맹을 맺으면서 공산권 국가들은 포위하는 그물을 만들어 나갔다. 사납게 맞대응에 나선 소련은 1955년바르샤바 조약을 체력하였다. 바르샤바조약기구는 소련의 진두지휘하에 동유럽을 방어하기 위한 정치.군사적 연합체였다.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와 바르샤바조약기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1949년 창설되었다. 소련의 공격을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 열두 나라가 연합하여 결성한 기구로, 벨기에, 캐나다, 데나크, 미국, 프랑스, 아이슬란드,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포르투갈 그리고 영국이 초기회원국이다. 1952년에는 그리스와 터키가. 1954년에는 독일연방공화국이, 1982년에는 스페인 합류했다. 이 가운데 프랑스는 1966년에 군사위원회에서 탈퇴했다가 1996년에 다시 가입했다.

 

 

나토는 상호방위를 위한 조약기구로서, 한 회원국이 공격을 받을 경우 통합사령부의 명령하에 연합국의 군대가 지원 작전을 펴기로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미국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기구였다.

 

나토를 통해서 미국은 유럽안에 미군기지를 늘리고 핵무기를 배치함으로써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다. 1980년대초, 나토군의 수는 480만명으로서 380만명의 바르샤바 조약군을 수적으로 압도했다. 그러나 전차, 전투기 및 핵무기 보유량 면에서 바르샤바조약군이 우위에 있었다.

1990년데로 들어서면서 동서의 대립은 종식되었고 "주적"은 사라졌다. 시대 변화에 발맞추어, 유럽은 나토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다시 정의 하였다. 1994년 1월에는 중립국, 과거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들과의 협력을 모색하여 평화를 위한 동반자 계획을 발표했다. 이어 1999년에는 폴란드, 헝가리, 체코 공화국을 새로운 회원국으로 받아들였다.

1997년에는 우크라이나와 협력관계를 맺었고, 2002년에는 NATO-러시아 위원회가 창설되었다.

 

 

 

 

한편 바르샤바조약기구는 소련이 나토의 창설에 대항하여 1955년 설립한 기구이다. 소련이 지휘하는 군사 연합체로서, 회원국은 소련, 알바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폴란드, 독일민주공화국, 루마니아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 8개국이었다. 이 가운데 알바니아는 1968년 탈퇴하였다.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군사적 목적과 동시에 정치적 목적도 추구하였다. 1956년 헝가리 그리고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자유화 운동이 일었다. 이때 소련은 유럽 공산권이 분열되는 것을 힘으로 막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바르샤바 조약을 들어 군사 개입을 합리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동유럽군이 무너진 뒤 "바르샤바조약기구" 는 더이상 존재 의미를 잃고 1991년 해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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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의 내용

역사 2013. 11. 9. 18:27

을사조약의 내용

 

 

 

구한말 광무 9년(1905년)에 우리나라를 대표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일본의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조인한 조약으로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는 9개 조문으로 되어 있다. 일명 "한일협약" 혹은 "을사5조약"이라고도 한다.

영. 일동맹, 포츠머스 조약, 카스라..태프트 밀약 등으로 한국에 대한 우위권을 확보한 일본은 보다 철저한 지배권을 유지할 새 조약을 필요로 하였다. 이것은 그 초안을 갖고 들어온 이토 히로부미가 국왕 이하 대신을 위협하여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영기의 반대를 뿌리치고 외부대신 박제순과 하야시 공사 간에 체결케 한 것이다.

 

 

 

이때 이 조약을 서명한 나머지 대신을 우사오적이라부르는 바,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내무대신 이지용,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을 말한다. 1905년 11월 17일에 체결된 을사조약은 5개조로 되어 있다.

 

 

 

을사조약

1. 일본정부는 일본 외무성을 통해 한국의 외교사무를 감독. 지도한다.

2. 일본정부는 한국과 제3국 간에 맺어진 종약의 실행을 완수할 것이며, 한국정부는 앞으로일본정부의

   중개 없이어떤 조약도 체결할 수 없다.

3. 일본정부는 그 대표자로서 황제 밑에 통감을 두고, 각 개항장에 이사관을 둔다.

4. 한국과 일본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약속은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그 효력을 계속한다.

5. 일본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 존엄을 유지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을사조약으로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함으로써 이른바 통감정치가 실시되었고, 외교권이 상실되었다. 이로써 한국에 있는 외교사절은 철수하였으며, 실질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된 것과 다름이 없었다. 따라서 국민의 항일운동이 다각적으로 야기되어 이후 민족운동의 커다란 계기와 근거를 찾게 하였다.

 

대한미국 국민으로 진정이 되지 않은 을사조약의 내용과 원인,

그리고 일본의 횡포, 더 화가 나는건 나라 팔아 먹으신분들 역사에 길이 길이 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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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의 건립

 

 

 

 

기원전 3500년경에 동방에서 뛰어난 주조 기술을 갖춘 인류 최초의 노예제 국가가 탄생했다. 기원전 2250년 경부터 이 곳에 거주한 수메르인은 설형문자를 발명하고 문자 기록에 용이한 점토판을 발명하는 등 선진 문명을 꽃피웠다. 기원전2006년에는 아모리인들이 우르 제3왕조를 멸망시키고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차지한 후 바빌로니아 왕국을 건립했다.

이곳의 비옥한 옥토와 고도로 발단한 문명은 아모리인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 주었다.

그후 수백 년 동안 마리, 이신, 라르사 등 도시 국가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이권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이처럼 혼란한 국면은 기원전 1792년에 함무라비가 즉위하면서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세계 고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이다. 바빌로니아는 바로 이 메소포타미아에 자리했다.

 

 

기원전 3,500년경부터 이곳에 거주한 수메르인들은 노예제 도시 국가를 세웠다. 그러나 우후 죽순으로 생겨나는 정권들 때문에 무질서하고 혼란한 국면이 이어졌고, 결국 수메르 정권은 빠르게 쇠락했다. 기원전 18세기경에 바빌로니아의 왕에 오른 함무라비는 스스로 "달의 신의 후예"라 칭하며 대규모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을 이용해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통일한 그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탄생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함무라비 왕이 죽고 나서 700여년 동안 지속된 바빌로니아왕국은 결국 아시리아인의 손에 멸망했다. 훗날 기원전 626년에 칼데아인이 이곳에 다시 바빌로니아 왕국을 재건했다. 이 "신 빌로니아" 왕국은 한때 전성기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기원전 538년에 페르시아에 귀속되었다.이렇게 해서 바빌로니아 문명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전형으로 꼽히는 바빌로니아문명은 기원전 40세기부터 형성 되었으며 수메르인, 바빌로니아인, 아시리아인,그리고 칼데아인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총 4단계로 뉘는데 그 1단계는 기원전 2250년경 수메르인이 창조한 문명이다. 이들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의 빈번한 범람에 대비하고자연재해를 막기 위해 천상을 관측하는 "태음력"을 발명했다. 태음력은 달빛의 밝기와 모양을 관찬해 1년 354일로 정하고 12월로 나눴으며 밤낮을 각각12시로 구분하는 것이다. 처음으로 윤달을 사용한 것도 수메르인들이다. 수학에 조예가 깊었던 이들은 분수 계산법과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 등 사칙연산 그리고 2차 방정식의 해법까지 파악했다. 또 십진법 과 육십진법을 발명했으며,원주율 '파이'의 값이 3에 가깝다는 사실까지 산출했냈다. 원전 19세기에 아모리인들이 바빌로니아 문명의 2단계를 열었다.

 

바빌로니아 문명의 최고 전성기를 꼽히는 이시기에 [함무라비 법전]이 반포되었다. 주조 기술과제련 기술이 발달해 쟁기, 짐차, 전차등이 차례로 세상에 선보였으며, 이때부터 철기 새대에 진입했다고 볼수 있다.

아시리아인이 주도한 3단계는 평범한 시대였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에 칼데아인이 다시 한번 바빌로니아의 번영을 이끌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유적이 바로 공중정원이다. 바빌로니아 문명은 고대 이집트 문명과인더스 문명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또 이들이 확립한 수학, 물리학, 철학,체제는 고대 그리스문명에 깊이 흡수 되었으며 건축학은 아랍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공중정원: 바빌로니아 문명의 상징 공중정원은 신바빌로니아의 국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왕비로 맞아들인 메디아 왕국의 아미티스 공주를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사다리 모양의정원이 성벽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 마치 공중에 걸려 있는 듯 보인다고 하여 공중정원 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정원 윗부분에는 희귀한 꽃들이 가득 심어져 있었다. 후에 바빌로니아 성이 황사에 뒤덮이면서 공중정원도 모래 속으로 사라졌다. 2세기에 그리스 학자들에게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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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흑사병(전염병), 데카메론

 

 

[데카메론]에 등장한 인물들 흑사병의 공포에 대해이야기 나눔

 

인류 사회의 대변혁은 인위적 요소가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쟁, 종교개혁, 신항로의 발견 등을 그 예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14세기에 유럽을 강타한 자연재해는 사회 구조를 변화 시킨 것은 물론 인류의 신앙마저 무너뜨린 아주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전유럽을 공포로 몰아 넣은 그 주범은 바로 흑사병이었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당시 유럽의 악몽이 흑사병 배경으로 쓴 작품이다.

이 책에는 전염병의 일종인 흑사병으로 길을 걷다가 갑자기 쓰러져 죽음을 맞는 흑사병 걸린 사람, 집안에서 며칠째 방치되어 있다가 이웃까지 악취가 풍긴 다음에야 겨우 발견된 흑사병으로 죽은 시신, 흑사병으로 교회와 묘지에는 시체가 넘쳐나고 화물차에 짐짝처럼 실려 가다가 그대로 매장되는 흑사병의 시체들 등 비참한 흑사병으로 죽은 상황이 그대로 묘사 되었다. 전염병인 흑사병으로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마을에 인적이 사라지고 가축들이 거리를 활보하며 기아가 전유럽을 휩쓸었다.

 

데카메론에 흑사병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주인공 10명

 

한편에서는 이러한 전염병이 흑사병이 도는 상황을 이용해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이들은 얼떨결에 생긴 벼락 재산으로 밤낮으로 연회를 열고 유희를 즐겼다.

선교사와 수도사들 까지 이들의 대열에 합류하는가 하면, 국가 재산으로 자기 배를 채우는 정치가들이 속출하면서 사회 질서는 문란해질 대로 문란해졌다. 유럽에 전염병인 흑사병이 처음 발생한 해는 1348년이다. 흑사병은 발병하면 온 몸에 검은 반점이 생기는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페스트의 일종으로 아시아 서남부에서 흑사병이 처음 발생한 후 흑사병은 항해 선박을 따라 흑해, 지중해, 북대서양 연안, 발트 해까지 흑사병인 전염병이 확산 되었다. 결국 유럽 전역에 흑사병인 전염병이 퍼진 것이다. 이 전염병(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전반에 달하는 2,500만 명이 사망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7,500만명이 흑사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영국와 프랑스 간의 백년 전쟁도 흑사병으로 잠시 중단될 정도였다.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면서 농민 대부분이 목숨을 잃자 봉건 체제가 동요하기 시작했고 흑사병에서 생존자들은 자유를 찾아 도시로 몰려 들었다. 이때부터 화폐로 소작료를 대신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새로운 상품 경제의 탄생을 부츠겼다.

흑사병은 봉건 체제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 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기독교의 지위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 무시무시한 전염병(흑사병) 앞에 성직자들도 고향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랐으며, 신의 손길이 가장 필요한 시점에 흑사병 앞에 무기력한 종교의 모습을 노출시키며 그 권위를 상실한 것이다. 오히려 흑사병 앞에 더 당당한 점술가들이 제 세상 만나듯 활개를 쳤다.

이후에도 전염병(흑사병)은 수차례 유럽 대륙을 강타했고, 18세기에 이르러서야 흑사병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핵폭탄의 위력에 비할 만한 흑사병(전염병)의 창궐로 유럽에서는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고, 봉건 체제도 와해 되었다. 또 유럽의 정신적 지주였던 로마 천주교회의 지위도 큰 타격을 입었다.

 

 위에서 설명한 [데카메론] 저자 보카치오 이는 흑사병이 유행하던 중세를 배경으로 한다. 데카메론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흑사병(전염병)의공포에 대해 이야기를 자세히 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대문호 보카치오의 대표작인 데카메론은 다시 발생한 흑사병을 배경으로 집필된 문학사상 최초의현실주의 단편 소설집이다. 흑사병을 피해 길을 떠난 젊은이 열 명이 열흘 동안 펼치는 이야기들로 구성되며, 당시의 금욕주의 세태와 종교, 신학을 신랄하게 비판해 향후 유럽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흑사병 생각 해봅시다. 아무 치료법도 없고 전염되는 이 흑사병이 나에게 걸렸다면 가족이나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걸렸다고 생각해본다면 그 시대가 얼마나 무질서하고 악이 성했을까 하는 생각은 금방 머리속을 스쳐 지나갑니다.

 

흑사병에 말도 안되는 치료제를 팔아 이득을 보는 사람, 흑사병에 걸려 살아 보려고 거리를 활보 하는 사람들, 전염이 될까 불로 태워 버리는 사람들, 숙청 또한 흑사병이 걸렸다는 제목으로 죽이는 사람들..

대략 머리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그 시대의 흑사병에 걸려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니

느낌이 바로 오는것 같아요..지금의 불치병인 말기암보다 더 심한 병이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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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대표작품들 

 

미켈란젤로 작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조각가 미켈란젤로, 

 

위대한 화가 미켈란젤로,  위대한 건축가 미켈란젤로,

 

위대한 시인인 미켈란제로는 인문주의 사상과

 

종교 개혁의 영향을 받아 주유에 대한

 

갈망과 투쟁 정신을 작품에 표현했다.

 

요나 미켈란젤로 작

 

르네상스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미켈란젤로의 회화와 조각 작품은

 

유럽 사회에 큰영향을 끼쳤다.

 

피에타 미켈란젤로 작

 

1499년 스물네살의 나이에 미켈란젤로는 

 

피에타 그리스도를 애도함 를 완성해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이후 모세, 묶여있는노예,

 

빈사의 노예등 걸작을 남겼다.

 

다비드 미켈란젤로 작

 

미켈란젤로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은 역시 다비드상 이다.

 

육신을 벗은 영혼의 모습을 묘사한

 

다비드상은 자유와 투쟁을 상징하며,

 

르네상스 시대의 정치적 의미가

 

가장 짙게 담긴 예술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미켈란젤로 작

 

역사속에 간직한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

 

일생과 그의 작품들

 

세계에서 가장 귀한 보물답게

 

그의 작품들에 혼이 느껴지는 멋진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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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의 탄생과 몰락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라는 말처럼

 

로마제국은 탄생에서 몰락까지 천여년의 긴 여정을 지나왔다.

 

 

볼래 이탈리아의 한도시 국가에 불과했지만

 

점차 세력이 강해지면서 전쟁을 이르켜 이탈리아, 카르타고,

 

북아프리카, 스페인, 그리스의 마케도니아왕국, 셀레우코스왕국

 

그리고 이집트의 톨레미왕국 등을 점령하였다.

 

그 결과, 과거 도시 국가의 틀을 벗고 지중해 대국으로 로마가 탄생한다.

 

 

 

기원전 1세기 중엽에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가

 

먼저 삼두정치(Triumviri)를 시작하며

 

로마의 정권을 장악했다.

 

카이사르가 차츰 두각을 드러내면서 로마 종신 집정관의 권좌에 올랐다.

 

카이사르가 활약한 시대에 로마는 대전환기를 맞이하며,

 

공화정치로는 이미 통치 계급의욕구를 만족 시킬수 없었다.

 

결국, 독재 정치에 가장 걸맞는 인물 카이사르가 모든 권력을 틀어 쥐으며,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실시했다.

 

 

골 지방의 베르킨게토릭스장군이 카이사르에게 투항하는 장면

 

정복 전쟁에 열을 올린 카이사르는 방대한 로마 제국을 건립했다.

 

 

 

[카이사르의 3대 명언]

 

1. 사람은 누구나 모든 현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현실만 본다.

 

2. 주사위는 던져 졌다.

[로마의 국법을 어기며 이말을 사용했다한다.]

 

3.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승전보에 섰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으로 로마는 번영을 누리게 되었으나,

 

카이사르가 암살 된후 다시 분열되었다.

 

 

 

카이사르의 뒤를 이은 옥타비아누스는 30년경에 정복전쟁을 이르켜 로마를 통일했다.

 

그는 독재 대신 공화제를 부활시키고 원로의 신임을 획득하며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얻었고, 그와함께 로마의 군사, 행정, 종교를 장악했다.

 

사회분야에 교통, 오락 및 공공시설을 대폭 증축해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효과를 거두워 사회질서는 차츰안정을 되찾았고 그의 위상과 명망은 갈수록

 

높아졌으며, 사회와 경제가 발전되며 그야 말로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284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역사 무대에 등장하면서 전환국면을 맞이 했다.

 

디아클레티아누스는 공화제의 잔여 세력을 모두 숙청하고

 

원로원의 실권을 박탈했다. 그 결과 국가 권력은 황제와 그 직속 기구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그는 행정 구역을 네 곳으로 나누고 사두 정치를 출범시켰다.

 

제국을 동서로 양분하고 두 명의 정제와 두 명의 부제를 두어 관리하게 한 것이다.

 

또 군주제를 확릭하고 대관식을 거행해 제위에 오르는 등

 

명실상부한 로마의 제1대황제가 되었다.

 

당분간 안정적인 정국을 유지 할수 있었으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권좌에서 물러난 후 로마는 다시 무질서 상태에 빠진다.

 

 

324년에 콘스탄티누스가 로마를 다시 통일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미 기울어진 로마의 운명을 되돌릴수 없었다.

 

395년에 로마는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열되었고 내부 봉기와

 

외적의 침입까지 맞물려 서로마제국이 먼저 멸망했다.

 

서로마의 멸망과 함께 수세기 동안 로마에서 지속되었던

 

노예제 사회가 막을 내리며 로마의 몰락 점차 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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